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스팅스 전투 (문단 편집) == [[왕좌의 게임]] == 이런 상황에서, 1066년 1월,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다. 일설에 의하면 에드워드는 자신의 숙적 고드윈 백작의 딸인 아내가 자식을 가지면 백작가의 힘이 너무 강해질까 두려워 자식을 가지지않았다고 한다.[* 물론 일설은 일설일 뿐이라,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.] 자식이 없는 채로 왕은 죽었고, 누가 왕위를 이을지 모호해진 상태. 야심에 찬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이 승계자임을 주장했다. 이 왕위 쟁탈 경쟁에 뛰어든 선수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, * [[해럴드 2세|해럴드 고드윈슨]] (Harold Godwinson, 해럴드 2세) - [[웨식스]]의 [[백작]](Earl of Wessex)이자, 위에서 말한 에드워드 왕의 라이벌 고드윈의 아들.[* 즉, 에드워드의 처남.] 가장 세력이 강했고, 가장 부유했다. 여기에 선왕인 에드워드의 인척이란 명분이 있었고 색슨족인 데다 색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. * [[하랄 3세]] (Harald III) - 이름은 하랄 하르드라다(Harald Hardrada).[* 정식 명칭은 하랄 시구르드손(Sigurdsson)이고 하르드라다는 '''[[폭군]]'''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. 실제로 노르웨이인들이 '''그 덴마크의 강압통치를 그리워할 정도로''' 더 가혹한 통치를 했다.] [[노르웨이]]의 왕인데, [[덴마크]] 왕 자리를 넘본 적이 있고 이제는 잉글랜드 왕도 넘보는 야심찬 인물. 노르웨이 왕이 되기 전에 15년간을 추방되어 지냈다. 추방 생활 당시 직업은 [[동로마 제국]] 황실 근위대 [[바랑기안 가드]] 사령관. 이쪽은 잉글랜드왕을 겸한 크누트 대왕 이래 노르웨이 왕으로서 잉글랜드의 왕위에 대한 명분이 있었다.[* 여담으로 에드워드의 어머니 노르망디의 엠마가 크누트 대왕과 재혼하기도 했어서, 족보상으로는 연결되어있긴하다.] * [[윌리엄 1세]] - [[노르망디 공국]]의 [[공작(작위)|공작]]. 노르망디 태생이다. 이 셋 중 가장 쌩뚱맞은 명분을 주장했다. 선왕인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망명 생활 당시에 노르망디의 영주인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후에 자기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것.[* 사실 위엣 각주에서 말했듯 에드워드의 어머니 엠마가 노르망디 출신이라 멀게멀게 에드워드와 핏줄로 연결되어있긴하다. 물론 그게 왕위를 요구할 수준은 안되지만.] 그런데 문제는 이 명분이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. 먼저, 가장 부유하면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웨식스의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 요크 [[대주교]]를 동원해 잽싸게 왕위를 수여받았다. 그러나 그것을 고분고분 인정할 경쟁자들이 아니었다. 당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예전에 에드워드가 다음 후계자는 나라고 지정했고 너도 동의하지 않았냐고 딴지를 걸었다.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도 이것은 자신의 선왕하고 잉글랜드의 [[하레크누드]] 왕이 이미 합의를 보았고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서로의 자식을 왕으로 즉위시켜주기로 했으므로 국왕의 작위는 본인의 것이라며 왕위를 주장했다. 더 큰 문제는, 두 경쟁자 모두 말로만 주장할 성깔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